영화 킬링 디어 (원제:the killing of a sacred deer)의 표현으로 보이는 독특한 스타일과, 부모의 책임과 실패 그리고 결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영화 킬링 디어의 독특한 방식
킬링디어는 운명이라는 주제를 탁월하게 엮어낸 작품입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이 영화는 운명에 대한 질문과 인간의 선택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그 경계선이 얼마나 종잇장처럼 얇은지를 탐구합니다. 란티모스 감독의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등장인물들이 직면한 선택과 도덕적 딜레마를 통해 드러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부터 운명은 주요한 요소로 등장하며, 인물들은 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사건의 속에 갇힌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운명이라는 개념은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틴이라는 십 대 소년은 운명의 힘을 상징하는 존재로 보이지만, 그의 존재는 점점 스티븐의 삶에 위협적으로 다가오며, 스티븐이 해결해야 할 도덕적 방정식을 제시합니다. 이는 마치 인과응보에 뿌리를 둔 것처럼 보입니다. 마틴의 아버지는 스티븐이 담당했던 수술 도중 암묵적 과실로 사망하게 되었고, 이때 스티븐의 행동이 고의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마틴은 스티븐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스티븐에게 우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희생을 요구하고, 이는 스티븐이 피할 수 없는 예정된 운명을 암시합니다. 마틴의 역할은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심판자이자 처형자 역할을 하며, 왜곡된 정의를 행동합니다. 스티븐의 가족에게 알 수 없는 병을 퍼뜨리는 그는 운명의 불가피함을 강조합니다. 가족 구성원들은 마비되고, 식욕을 잃으며, 결국 눈에서 피를 흘리게 됩니다. 이러한 증상은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초자연적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마틴이 스티븐에게 가족 중 한 명을 선택해 죽이라고 요구하는 장면은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신이 나 운명이 인간에게 불가능한 선택을 강요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 의지가 배제된 것은 아닙니다. 영화의 텐션은 스티븐이 스스로의 의지를 행사하려는 몸부림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마틴의 요구를 거부하며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으려 합니다. 다른 의사에게 도움을 청하고, 가족을 격리시키며, 마틴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들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스티븐의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오히려 운명의 힘을 더욱 부각합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의 병은 점점 악화됩니다. 스티븐의 선택은 자유 의지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가 선택을 망설이는 동안 가족은 더 큰 고통을 겪습니다. 이 망설임은 도덕적 책임감과 자기 보존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면을 반영합니다. 결국 스티븐은 눈을 가린 채 회전하며 총을 쏘아 희생자를 무작위로 결정하고 이 장면은 운명의 무게 아래 자유 의지가 붕괴되는 순간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운명은 다른 등장인물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스티븐의 아내인 애나는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녀는 스티븐에게 회피는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담담히 이야기합니다. 그녀의 수동성은 스티븐의 적극적이지만 헛된 저항과 대조를 이룹니다. 딸 킴과 아들 밥은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애원하지만, 그들의 운명은 스티븐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들의 연약함은 운명의 잔혹하고 냉정함을 강조합니다. 이야기의 구조는 운명과 자유 의지의 상호작용을 보여줍니다. 영화의 스토리 전개는 마치 도미노를 차례로 넘어뜨리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란티모스 감독은 냉정한 연출 방식을 사용해 불가피성을 강조합니다. 등장인물들은 차가운 분위기의 공간에서 움직이며, 이는 운명의 차갑고 기계적인 모습을 반영합니다. 음악이 없는 장면들이 많아지면서 긴장감이 고조되고, 관객은 등장인물들의 깊어지는 절망에 집중하게 됩니다. 운명과 자유 의지라는 주제는 고대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영화에 영감을 준 요소입니다. 이야기는 아가멤논이 신들을 달래기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시켜야 했던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스티븐도 승산 없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둘 다 권위자에 의해 짜인 사건의 그물에 갇혀 있습니다. 이 신화적 연결성은 영화에 보편성을 더해줍니다. 이는 인간이 운명과 자유 의지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시대를 초월한 주제임을 알립니다. 결론적으로, 성스러운 사슴의 죽음은 운명과 자유 의지의 사이의 팽팽함을 탐구합니다. 스티븐의 고뇌를 통해 영화는 인간이 선택권을 가진 존재인지, 운명의 도구에 불과한 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결말은 관객에게 도덕성, 정의, 그리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생각을 하도록 합니다.
2. 부모의 모습
영화 킬링디어는 영화에서 묘사하는 부모의 모습으로 부모의 책임과 실패라는 주제를 던집니다. 스티븐과 애나가 부모로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면밀히 살펴보며, 이들의 행동과 무기력이 자녀인 킴과 밥의 운명을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줍니다. 영화는 스티븐과 애나라는 부모를 통해 양육의 복잡성과 도덕적 딜레마를 탐구합니다. 스티븐은 명망 높은 외과 의사로서 겉으로는 그는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는 가족을 부양하며 안락한 삶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스티븐이 자녀들과 맺는 관계는 감정적으로 거리가 멉니다. 킴과 밥과의 대화는 차갑고 기계적이며, 감정적 교류는 결여되어 있습니다. 스티븐의 아내 애나는 부모로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또 다른 방식으로 노력합니다. 그녀는 스티븐보다 자녀들과 감정적으로는 더 잘 연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가족의 딜레마를 대하는 그녀의 접근 방식은 그녀의 우선순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애나는 가혹한 진실을 직면하고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데 주저하지 않지만 그녀의 행동은 때로 생존을 연민보다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화는 부모로서의 실패가 가족과 개인에게 가져오는 결과를 깊이 있게 다룹니다. 스티븐이 가족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력함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마틴의 비난은 스티븐의 능력과 도덕적 무결함을 시험하며, 그의 의사로서의 실패가 아버지로서의 역할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보입니다. 위기에 대처하는 스티븐의 반응은 그의 한계를 더 극명히 보여줍니다. 마틴의 주장이 명백해졌을 때, 스티븐은 망설임에 사로잡혀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그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한 단호한 행동을 취하기보다는, 상황을 좀 더 온화하게 처리하려 합니다. 그러나 스티븐의 노력은 모두 헛수고로 끝납니다. 애나의 접근 방식은 스티븐과 대조적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상황의 심각성을 빠르게 인지하고 스티븐에게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합니다. 그녀의 현실주의는 어머니로서의 단호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애나의 행동에도 결점이 없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녀는 마틴의 동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며 그를 속이려는 등 상황을 자신의 이익에 유리하게 조작하려 합니다. 이러한 계산된 행동은 결국 그녀의 양육 방식에 대한 윤리적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킴과 밥은 부모의 실패의 희생자가 됩니다. 그들은 스티븐과 애나를 의지하지만, 결국 비극적인 게임말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들의 병은 부모의 행동이 초래한 결과입니다. 아이들의 상태가 악화될수록 그들의 생존은 더 절박해집니다. 이러한 순간은 부모로서의 책임의 무게를 강조합니다. 영화는 또한 부모를 향한 사회적 기대를 비판적으로 드러냅니다. 스티븐과 애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대표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자녀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은 이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모습이 내면적으로는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냅니다. 물질적 풍요와 직업적 성공이 곧 효과적인 양육으로 이어지지는 않음을 시사합니다. 부모라는 주제는 영화의 신화적 요소들로 더욱 강조됩니다.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이피게네이아 신화와의 평행 구조는 부모로서의 부담을 나타냅니다. 신화에서 아가멤논이 신들을 달래기 위해 딸을 희생시켜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티븐은 가족을 구하기 위해 해결할 수 없는 선택에 직면합니다. 두 이야기의 대립은 부모로서의 결정이 가지는 도덕적 복잡성을 강조합니다. 스티븐과 애나의 행동은 양육과 개인의 윤리적 딜레마를 대립해 보여줍니다.
3. 결말
영화는 관객에게 깊은 불편함을 선사합니다. 도덕성, 정의에 대한 불편한 질문을 관객에게 던집니다. 영화의 긴장감 넘치는 서사가 비극적인 해결로 이어지며, 많은 부분에 해석의 여지를 남깁니다. 이 결말은 영화 자체처럼 단순한 설명을 거부하며,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작품 중 가장 논쟁적인 작품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스티븐은 눈을 가리고 총을 들고 빙글빙글 돌며 가족 중 누구를 죽일지 무작위로 결정합니다. 이 장면은 운명의 무게 아래 이성이 무너지고 자유 의지가 붕괴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의 행위는 도덕적 책임을 포기하고, 우연에 결과를 맡깁니다. 이 행위는 마틴의 요구를 충족시키며 가족을 괴롭히던 수수께끼를 끝냅니다. 가족의 반응은 섬뜩할 정도로 무덤덤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스티븐, 앤, 킴은 조용히 식사를 합니다. 그들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모습은 상황에 대한 냉정한 수용을 암시합니다. 이 절제된 연출은 관객에게 극도의 불안감을 남깁니다. 결말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은 정의의 개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마틴의 최후통첩은 스티븐이 그의 아버지를 수술하다 실패해 죽게 만든 것에 대한 응징입니다. 마틴의 행동은 극단적이지만, 스티븐이 자신의 죄책감과 책임을 직접 마주하도록 강요합니다. 희생을 요구함으로써, 왜곡된 정의를 강요합니다. 밥을 죽이는 행위는 스티븐이 균형을 회복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이 해결책은 불공정하게 느껴집니다. 밥의 죽음은 응보적 정의의 임의적이고 잔혹한 면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희생이 정말로 도덕적 균형을 이루는지, 아니면 더 큰 불의를 초래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죄책감의 주제는 영화와 그 결말의 핵심입니다. 이야기 내내 스티븐의 행동은 그가 마틴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음을 보입니다. 스티븐이 이를 직접적으로 마주하기를 꺼리는 모습은 그의 초기 부정과 마틴의 요구에 대한 회피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밥의 희생은 어쩌면 속죄의 행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가족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짐으로써 스티븐은 가족이 아닌 자신을 구원하려 합니다. 영화의 결말에 대한 미니멀리즘적 접근은 란티모스 감독의 의도적인 선택입니다. 드라마틱한 음악이나 명백한 감정 표현이 없는 대신, 침묵과 거리감이 사건의 공포를 증폭시킵니다. 저녁 식사 장면이 이러한 접근법을 잘 보여줍니다. 가족의 냉담한 태도는 그들이 새로운 현실에 순응했음을 표현합니다. 대화가 없는 상황은 그들의 내면의 생각을 관객이 스스로를 투영하여 해석하도록 합니다.